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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윤리
브리프스

2017년
3월호

윤리연구소 - 시사톡톡

"세습기업 백년제국, 스웨덴 발렌베리 그룹은 "

발렌베리 그룹이 있는 스웨덴
스웨덴은 실업률이 낮고 고용안정성이 높은 나라로 특히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이 OECD 최고 수준인 약 80%에 이른다. 실업자의 재취업을 위한 직업훈련과 구인구직활동의 체계적인 결합은 ‘적극적 노동시장정책’으로 불리며 세계 각국의 벤치마킹 대상이 되고 있다. 또한 국제투명성기구(TI)의 부패인식지수(CPI) 조사에서 매년 톱5 안에 들 정도로 기업투명성이 높고 부패와는 거리가 먼 나라다. 기업의 최고경영자들은 친환경이나 노동자복지 나아가 윤리경영의 장점을 진지하게 논의할 정도로 사회적 책임의식이 높다.

수출주도 산업화로 무역의존도가 높은 스웨덴은 우리나라와 비슷하게 몇몇 가문들이 주요 기업들을 집중적으로 소유, 지배하고 있다. 따라서 스웨덴에서도 반기업 정서는 존재한다. 가구회사 이케아 창업자 잉그바르 캄프라드는 세계 4위의 슈퍼리치이지만 세금회피를 위해 스위스로 이주하여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이와 달리 스웨덴에서 존경받는 기업 가운데 하나가 현재 5대째 세습경영을 하고 있는 발렌베리 그룹이다. 우리사회에서 세습은 굉장히 부정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져서 선뜻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지만 발렌베리 가문의 독특한 경영 철학과 방침은 발렌베리 왕국을 백년을 넘게 유지시킨 원동력이었다.
160년 6대 세습을 눈앞에 둔 발렌베리

발렌베리 가문이 스웨덴 경제사에 등장한 것은 1857년 앙드레 오스카 발렌베리가 스웨덴 최초의 근대적 상업은행인 스톡홀름 개인은행(SEB)을 설립하여 큰 성공을 거두면서부터다. 이 은행은 대출기업의 경영에 깊이 관여했고 경제침체기에는 기업들 간의 인수합병 등 구조조정작업도 이끌었다. 1916년 설립된 새로운 투자회사 인베스토르가 지주회사로서 기업에 대한 지배력을 행사하는 방식은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 2대 경영세습을 통해 장남 크누트 아가톤 발렌베리와 이복동생 마르쿠스 발렌베리 시니어가 가업을 이으면서 독특한 경영방식인 ‘2인 지배체제 (two-top system)’가 시작되었다. '투톱 경영'은 항상 두 사람의 후계자가 금융과 산업을 나눠 맡으면서 그룹을 이원 지배하는 방식으로 계열사의 회장과 이사직도 골고루 나눠 갖는다. 보통 한 사람은 가문의 맏이에게, 다른 한 사람은 형제 중 경영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경쟁을 통해 선발된다. 전성기는 3대 발렌베리 시기로 야콥 발렌베리가 금융부문을, 마르쿠스 발렌베리 주니어가 산업부문을 담당하며 가문의 기업 수를 한층 늘려갔다. 4대 발렌베리인 페테르를 거쳐 현재 5대 발렌베리 동갑내기 사촌 마르쿠스와 야콥이 투톱으로서 가문 기업들을 이끌고 있고 6대 세습을 준비하고 있다. 차세대 발렌베리 리더 그룹은 30대 이하의 친족 30명 정도로 구성될 것으로 알려졌다.

발렌베리 가문 기업은 최전성기였던 1970년대 스웨덴 산업인력의 40%를 고용했고 스톡홀름 주식시장 총액의 40%를 차지했다. 발렌베리의 포트폴리오 산업체는 스웨덴 대표은행 SEB, 가전 Electrolux, 통신 Ericsson, 항공기 및 자동차 Saab, 전력 분야의 세계적 기업 ABB, 산업기계 Atlas Copco, 제약 AstraZeneca, Grand Hotel, 미국 장외 주식시장 NASDAQ 등 대표 간판기업 19곳을 포함 100여개 기업의 지분을 소유하고 있다. 내용적으로도 기술집약적인 산업분야에서 숙박서비스 기업까지 매우 폭넓게 펼쳐져 있다. 2010년 기준 이들 기업집단은 연매출액 1100억 달러로 스웨덴 국내총생산의 약 30%에 이른다.

스웨덴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경제 주체인 발렌베리 가문은 기업 의사결정에 미치는 영향력이 엄청나지만 예상과 다르게 각 개인은 스웨덴 부자명단에서 그 이름을 찾기 어렵다. 스웨덴 경제지 ‘Veckans affärer’(주간 사업)가 2014년 147대 부자 명단을 공개했는데, 발렌베리 가문 구성원 중 그 누구도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가문의 부는 대부분 공익재단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개인 재산은 빈약하다고 느껴질 정도다. 하지만 발렌베리 제국의 핵심 지주회사인 인베스토르 이사회는 발렌베리 가문 구성원이 장악하고 있다. 이사회 의장직과 부의장은 발렌베리 투톱이 맡고 있고 나머지 이사들도 발렌베리 그룹의 전문경영인 출신이거나 대학교수 출신으로 친정체제를 확실히 구축하고 있다. 제국의 또 다른 축인 상업은행 SEB 의사회의 의장직도 발렌베리 가문의 핵심 구성원이 맡아서 전통적으로 인베스토르와 SEB의 이사회를 장악하는 방식으로 그룹 내 기업들의 경영을 지도하고 있다. 경영세습과 막대한 부의 축적에도 불구하고 발렌베리 그룹이 국민기업이 된 까닭은 지난 160년 간 ‘기업의 생존 기반은 사회’라는 창업자 정신을 실천했기 때문이다. 발렌베리 가문은 한번 세운 원칙을 철저히 지켜왔다. 6대 세습을 눈앞에 둔 발렌베리 가문의 명맥은 독특한 후계구도를 지니고 있다.

‘존재하지만 드러내지 않고’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다

발렌베리 가문의 가계도에는 세대마다 적어도 한 명의 마쿠스와 한 명의 야콥이라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이러한 독특한 명명법은 발렌베리 가문의 오랜 전통에 따른 것이다. 이는 후손들에게 강한 가족구성원으로서의 책임감과 유대의식을 심어주기 위한 것으로, 미래세대의 성공을 기원하는 그들만의 방식이다. 발렌베리 그룹은 “가족기업이라는 절대 원칙을 이어가되 경영에 적합한 사람이 있는 경우에 한 한다”는 규칙이 있다. 해군사관학교 출신의 그룹설립자 앙드레 오스카 발렌베리는 자녀들을 △해군사관학교에 입학시켜 애국심을 고취시키고 △세계 금융 중심지에서 경험과 능력을 쌓게 하는 치밀한 후계프로그램을 실천했다. 이 과정에서 검증된 2명이 후계자로 선정되어 ‘견제와 균형’의 원리 아래 발렌베리 가문이 사회적인 책임을 다하도록 이끌어야 했다. 발렌베리 가문은 북유럽 최초의 경제대학 ‘스톡홀름경제대학’ 설립을 주도하여 스웨덴의 수많은 경영자를 길러냈고 그들에게 사회적 책임을 갖게 했다.

발렌베리는 특히 어린 자녀들에게 특권보다는 의무와 책임에 대해 가르쳤다. 발렌베리는 ‘존재하지만 드러내지 않는다(Esse non videri)’는 가문의 모토 아래 대중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노력하고 미디어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을 금기시한다. 그 결과 발렌베리 가문이 탈세나 사생활 문제 등으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적이 없었다. 그러나 사회공동체가 위기에 처하면 앞장서서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실천해왔다. 1980년대 초 경제가 어려운 상황에서 이케아는 절세를 위해 본사를 네덜란드로 옮겨갔지만, 발렌베리 가문은 출혈을 감수하면서도 스위스 등 조세 피난처로 가지 않고 인구 900만 명의 내수시장에서 창출한 부를 오히려 사회에 환원하였다.

발렌베리 가문에서 기업 활동 외에 다른 방식으로 국가에 봉사하거나 인도주의적 실천을 한 인물들이 여럿 있다. 2대 발렌베리 크누트 아가톤은 1차 세계대전 중 외무부 장관직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등 다양한 공직활동을 통해 국가에 봉사했다. 또한 자신의 국제 비즈니스 네트워크를 활용하여 스웨덴 국채의 해외 발행을 지원하기도 했다. 스웨덴의 가장 존경받는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인 4대 발렌베리 라울은 2차 세계대전 말 헝가리 주재 외교관으로서 위험을 무릅쓰고 나치 치하 헝가리 유태인들의 아우슈비츠 이송과 학살을 막아 무려 10만 명의 목숨을 구했다. ‘스웨덴의 쉰들러’라고 불리는 그는 헝가리로 진격한 소련군에 의해 미국 정보기관의 첩자라는 의심을 받아 소련으로 이송되었다가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오랜 세월에 걸친 다양한 공익적 활동을 통해 발렌베리 가문은 스웨덴 국민에게 애국적이고 기품 있는 가문으로 인식되고 있다.

소유 대신 공익재단을 통한 기업지배

발렌베리 그룹의 실질적인 주인은 가문의 후계자가 아니라 발렌베리 재단이라고 할 수 있다. 5대 세습에도 불구하고 국민적 저항 없이 지금과 같은 소유구조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재단을 정점에 둔 피라미드식 소유구조 때문이라고 평가한다. 15개의 공익재단이 지주회사 인베스트로의 지분을 갖고 있는데, 크누트-앨리스 발렌베리, 마리안-마르쿠스 발렌베리, 마르쿠스-아말리아 발렌베리 등 대표적인 3개 재단이 가진 지분은 42.9%에 달한다. 160년 간 축적한 부의 대부분이 3개 재단에 나눠져 있는 셈이다. 발렌베리 그룹은 매년 그룹 이익금의 85%를 법인세로 납부, 사회에 환원한다. 발렌베리 재단의 수익금도 전액 기초기술과 학술지원 등 공익목적에 쓰인다. 그리고 발렌베리 그룹의 토대가 사회에 있다는 흔들림 없는 신념에 따라 대학, 도서관, 박물관을 건립해서 사회 전체가 혜택을 볼 수 있게 한다. 탄생 100주년을 맞는 가장 큰 규모의 크누트-앨리스 발렌베리 재단이 설립 이래 지금까지 기부한 금액은 총 135억 크로나(약 2조 300억 원)에 이른다. 스웨덴의 과학자치고 발렌베리 재단의 연구 자금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이고 노벨상 위원회에도 거액을 기부하고 있다.

발렌베리 그룹은 기업을 ‘소유’하기 어려워도 재단을 통해 ‘지배’는 할 수 있다는 발상의 전환에 성공한 것이다. 막대한 세금과 이익을 사회에 환원하는 대신 한 가지 ‘조건’을 내걸었는데, 그것은 소위 ‘황금주’라고 불리는 ‘차등의결권’ 제도이다. 발렌베리 가문의 상당수 주식은 일반 주식의 최대 1000배(현재 최대 10배)에 달하는 의결권을 부여받아 기업경영권이 확실하게 보장된다. 차등의결권을 가진 주식을 합해 재단 소유 주식의 의결권은 90%에 육박한다. 이 독특한 제도의 연원은 극심한 노사분규에 시달렸던 193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스웨덴경영자연합(SAF), 스웨덴노총(LO), 그리고 정부의 3자 간 역사적인 ‘노·사·정 대타협’인 살트셰바덴협약(Saltsjobaden Agreement)을 체결했다. 이 협약의 핵심 내용은 △차등의결권 제도를 도입해 오너 일가의 기업 지배권을 인정하고 △대신 기업이익금의 85%를 법인세로 납부한다는 것이다. 기업의 선택 사항이었지만 이후 북유럽에서 확산되어 2011년 현재 스웨덴 상장 기업의 55%, 핀란드 상장 회사의 36%, 덴마크 상장 주식회사의 33%가 이 제도를 실시하고 있다. 특히 협약에 규정된 해고 노동자의 재교육과 직장 알선을 주선하는 적극적 노동시장정책은 스웨덴 노사관계 안정의 밑거름이 됐다.

발렌베리는 협약 체결 후 노동조합을 경영 파트너로 인정하여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기 시작했고 노조 지도자들과 스스럼없이 만나 의견을 나누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스웨덴의 노조는 법에 따라 일정 규모 이상의 기업에서는 이사회에 참여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다. 실제로 에릭슨의 이사회 멤버 15명 가운데 6명이 노동자 대표로서 노조와 경영의 파트너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발렌베리 그룹의 투명경영과 사회공헌

발렌베리 그룹이 외형적인 기업규모나 경쟁력보다 더욱 돋보이게 하는 것은 바로 투명경영과 사회공헌을 강조하는 그들의 경영철학이다. 이것이 160년 동안 5세대에 걸쳐 소위 세습경영을 펼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적 지지와 사회적인 존경을 받게 만든 원동력인 것이다. 스웨덴 정부가 나서서 차등의결권 제도 등을 통해 외국인의 적대적 인수·합병 가능성을 차단할 만큼 발렌베리 그룹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각별하다. 발렌베리 그룹은 유통이나 식품 등 이른바 중소기업형 사업 분야에 투자한 적이 한 번도 없을 정도로 이윤에만 집착하는 기업이 아니다. 엄청난 경제 집중도를 갖고 있지만 증여·상속 과정에서 변칙적이고 불법적인 문제를 한 번도 일으킨 적도 없다.

발렌베리 그룹이 재단을 통해 지주회사를 확실하게 지배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지주회사 산하 기업들의 경영정보를 적극적으로 공개하면서 ‘투명경영’을 실천해왔다는 사실이다. 발렌베리 그룹은 가문 구성원이 각 계열사 이사로 경영에 참여하는 투명한 독립 경영체제를 유지하기 때문에 비공개로 자회사에 투자해 주식시장 상장으로 막대한 시세차익을 누리는 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뿐만 아니라 발렌베리는 경영인 우선주의 철학을 바탕으로 능력 있는 전문경영인에게 경영권을 일임하고 있지만, 기업에 대한 장기적인 책임을 철저하게 묻는 '적극적 오너십'을 실천하고 있다. 이처럼 발렌베리는 그 내면의 경영철학, 기업가 정신, 사회공헌에 이르기까지 우리 기업에게 신선한 화두를 던져주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스웨덴에서 오랜 기간 지속된 노사화합의 평등한 사회적 문화는 발렌베리 그룹이 80년 전부터 솔선수범해왔기에 가능한 것이며 기업신뢰도가 바닥인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 매우 크다.


참고